쉼. 먼지 맛 담배 한모금
'독룻' 또 다른 나의 이름 본문
‘독룻’ 내 원주민 이름이다. 어떻게 불리는지가 그 위치를 말해주는 건 어디든 마찬가지다. 여든이 넘으신 메리놀 신부님은 이곳 산동네에서 ‘아버지 신부’로 불린다. 그 신부님이 내 원주민 이름을 지어주셨다. 할아버지 신부님은 삼십년 가까이 이 곳 본당 신부로 일하면서 원주민말로 전례서와 성경을 만드셨다. 사실 이 곳 원주민 보다 더 원주민말을 잘해서 젊은이들은 신부님 만나서 대화를 하면 항상 꾸중을 듣는다. 자신들의 모어(母語)를 잘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산속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며 중고등학교를 다니기에 모어는 점점 더 젊은이들 사이에서 듣기 힘들어진다. 사실 언어를 잊는 것이 언어를 잃는 것이요, 언어를 잃는 것은 신원을 잃는 것이라 생김을 제외하고 자꾸만 한족을 닮아가는 그들을 보면 안타까움이 깊다.
언어 얘기가 나왔으니 사실 할 얘기가 많다. 대만으로 넘어온지 5년을 겨우 넘겼는데 배웠고 배우고 있고 쓰고 있는 언어가 네가지이다. 짐작하듯이 중국어. 지난 호에 말했듯이 겨우 50년 넘긴 말이다. 장개석이 중국 본토에서 패전하고 대만으로 쫓겨왔을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언어인데, 길고 긴 계엄령 안에서 강요되어온 중국 본토의 말이다.(지금은 대만의 특색이 있다고들 한다) 두번째는 민남어다. 중국의 복건성 남부에서 쓰는 방언으로 언제 어디서 한족이 대만으로 넘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언어이다. 이 섬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500년 정도 되었다. 중국어는 4성조, 민남어는 8성조를 가졌다. 세번째는 원주민말이다. 대만에는 13개의 다른 원주민 부족이 있는데, 각자 스스로의 언어를 가졌다. 그 중의 하나 부눈(Bunun: 뜻은 사람)족의 말을 쓴다. 네번째는 영어다. 메리놀선교회는 미국외방선교회다. 그래서 당연히 영어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 회의, 피정, 미사, 업무 등등. 이 복잡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장소를 보면 그 언어가 가진 자리가 갸늠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어는 도시에서 쓴다. 번화한 곳일수록 다른 언어를 자취를 감춘다. 민남어는 시장에서 유용하다. 장사하는 사람에게 이 말을 쓰면 차마 속이려 하지 않는다. 원주민말은 산를 벗어나서는 쓸 곳이 없다. 산에서도 나이가 좀 있는 분들 아니라면 중국어가 먼저 나온다. 영어는 메리놀 센터에 가면 꼭 써야한다. 배운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영어는 중학교 때부터 배웠고, 민남어는 대만 도착해서 일년, 중국어는 그 후 8개월, 원주민말은 이 곳 산에서 일하면서 천천히 익혀가고 있다.
오래전 선교사로 대만에서 살고 계시는 메리놀 할아버지 신부님들은 항상 말씀하시길, ‘장사를 하려면 첫번째도 목, 두번째도 목, 세번째도 목이듯이, 선교를 하려면 첫번째도 언어, 두번째도 언어, 세번째도 언어’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현지에 살기 위해서 배운 언어라고는 하지만 사실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엄청나게 다르다. 원주민 마을에 살면서 준비하기 시작해서 지난 부활절대축일에 처음으로 원주민 말로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가 끝나고는 항상 멀찍이 바라보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다가와서는 말로 할 수 없는 감동을 했다고 손을 꼭 잡고 잘 안되는 중국어를 늘어놓으신다. 원주민 본당에 자신들의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신부가 부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원주민 지구에서 일하고 있는 신부들이 반은 외국인이고 반은 원주민이지만 모두 같은 부족은 아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모어로 드리는 미사를 참여하는 것이 더없이 행복하게 느껴지는듯 하다.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전해준 신앙인데 또 다른 언어 중국어로 그걸 표현하자니 어르신들에게는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짧은 한마디이지만 그들의 언어로 안부를 묻고 관심을 가져주고 그 조상들의 삶을 궁금해하고 그들의 먹거리를 맛있게 먹고 그들의 노래를 자연스레 따라하고 그들의 옷을 입고 그들 안에 산다면 더 이상 ‘그들’이라는 경계를 넘어 ‘우리’로 불리는 삶이 될 것이라 기대해본다. 그 것이 선교사의 삶이 아닐까?
나의 이름 ‘독룻’은 지금 총회장의 남편 이름이다. 잘 생기고 키가 크다는 의미라고 한다(이건 나를 속인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름은 할아버지의 것을 받아 대를 이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묻는 것는 할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고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문득 내 이름 석자가 조상들의 삶을 담는 역사책처럼 느껴진다.
PS. '참소중한당신'에 연재 중인 원고입니다.